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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의 죽음에 대한 고찰

by 업데이트 완료 2024. 10. 23.

조선시대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군대를 치밀하게 조직하고 강화시킨 효종은 1659년 역사적인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소 본인이 자주 감염되어 치료를 받아았던 종기를 다스리지 못하고 위중한 상태까지 이르러 결국에는 고름을 짜내고 시침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당시의 의술 및 의료 관행, 왕실 어의의 역할, 그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환경에 대한 의문을 남기고 진료를 담당했던 의관을 사형에 처함으로써 마무리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왕의 건강관리와 대책에 대한 큰 그림자를 남겼으며, 작은 질병이라도 치명적일 수 있었던 조선시대 의료의 위태로움을 부각시켰습니다. 효종이 종기로 사망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의술과 그의 죽음의 실제 원인, 그리고 주변의 정치적, 사회적 요인에 대한 연구가 필요합니다.

 



조선시대의 의료기술


지금으로부터 300여년전, 17세기 조선의 의학과 연관된 지식은 전통 동양의학의 침술, 탕약이 주를 이루는 형태였습니다.

왕을 섬기는 의관들은 '어의'로 불리며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왕실을 진료함은 물론 치료결과에 있어서 모든 책임을 져야했기 때문에 작은 실수에도 심리적인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가 치료에도 불구하고 더욱 악화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름을 짜고 오염된 피를 빼내는 시술을 하였는데 그게 직접적인 사인으로 효종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습니다. 

효종의 종기 치료에는 침술, 약초 요법이 실시되었으며, 그러한 상태에 대한 일반적인 관행대로 외과적 시술도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종기를 치료하지 않거나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발생할 수 있는 감염, 농양 또는 패혈증을 치료할 만큼 의학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감염의 원인과 세균 오염에 대한 이해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왕은 고도로 훈련된 어의와 침술사로부터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의 신가귀의 마지막 시술로 인한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시침을 통하여 나쁜 피(세균에 감염된 피)를 빼내려는 시도였으며 효종의 상태는 이미 면역력이 극도로 약화된 상태로 세균이 혈액으로 침투하는 것은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종기와 감염의 특성



세균으로 인해 경미한 피부 감염으로 발생하는 종기는 시기를 놓치게 되면 2차감염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비누나 항생제가 없는 환경이라 더욱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기는 모낭이나 모근에 있는 기름샘이 박테리아(종종 황색포도상구균)에 감염되어 고름으로 가득 찬 통증이 있는 덩어리로 이어질 때 발생합니다. 종기가 더 커지거나 더 깊은 조직으로 퍼지면 봉와직염이나 농양 형성과 같은 더 심각한 상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효종의 경우 종기가 심각하게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높고 잦은 감염으로 감염에 대한 면역반응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세균이나 살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2차감염에 대해 의학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부족해 치료로 인해 무심코 감염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침술을 사용하거나 종기를 절개하는 행위은 더 많은 박테리아를 유입시켜 감염 확산을 가속화하고 이미 신체적인 면역저하로 심각한 상태를 발생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의사의 역할과 처벌



최종적으로 국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했던 어의 신가귀가 의료 과실 혐의로 처형됐습니다. 이는 어의들이 왕실의 건강에 대한 막중한 책임을 안고, 실패할 경우 모든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는 조선 왕조의 법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심각한 결과는 당시 어의는 실패에 대한 엄청난 압박감으로 인해 제한된 의료 를 펼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신가귀의 경우는 목을 베는 참수형은 면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현종실록에는 참형을 미루다가 결국 교수형으로 형을 집행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체를 보존할 수 있게 배려한 형집행으로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악화되자 조정에서는 이들의 실패를 범죄행위로 간주하여 교수형에 처하게 되었다고 보여집니다. 

 

 

효종의 죽음을 초래한 기본 요인

 

 

효종의 죽음에 이르게 된 다른 근본적인 요인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효종은 스스로도 무예를 닦고 심지어 그가 다루는 무기는 보통 무기와는 달리 엄청난 무게와 크기를 자랑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의 통치철학은 만주족을 비롯한 외세 침략자들에 맞서 국가의 방어력을 재건하기 위한 끊임없는 군사 작전과 노력이 대표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한 신체적, 정서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면역 체계가 약화되고 감염에 더 취약하게 되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며 국가를 이끌면서 당파 투쟁과 문신들의 권력 싸움과 같은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왕의 건강상태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과적으로 효종의 죽음은 겉으로 사소해 보이는 질병이 조선시대 의학의 한계와 시대적 사회정치적 심리적 압박으로 인해 왕의 치명적인 사인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국왕의 죽음은 조선왕조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으며, 의료체계가 부재한 상황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강력한 권력자라 할지라도 질병에 대해 얼마나 취약한지를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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