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몽진으로 인해 관군도 사기를 잃고 퇴각하는 전장, 임진왜란(1592년~1598년) 때 일본군에 저항하여 군량미 보급을 끊고 명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군을 패퇴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의병들을 소개합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원하여 봉기하였으며 조국을 지키기 위해 일어난 양반, 승려, 학자, 농부, 평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아래 6명의 주목할만한 의병장들과 그들의 업적을 소개합니다.
1. 곽재우, 1552–1617
별명: "홍의장군"(홍의장군)
홍의장군 곽재우는 가장 유명한 의병 지도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경상도에서 의병부대를 창설했고 게릴라전술로 유명했습니다. 용맹하기도 하고 전술을 잘 만들어 적군을 괴롭히는 무서운 장수이기도 했는데 그와 함께한 의병들은 왜병의 보급선을 타격하고 적군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는 전투에서 자주 붉은 도포를 입고 전투에 참가했는데 이를 본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지며 '홍의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곽재우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 정문부, 1565–1624
북쪽에 있는 함경도에서 의용군을 이끌었던 정문부의 유명한 업적은 1592년 정량산 전투로, 이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조선의 북부 지역으로 침입한 왜군을 격파했습니다. 그의 지도력은 왜군이 조선의 북부를 점령하는 것을 막고 지방을 통제하는 것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함경도로 파죽지세로 쳐들어온 왜군을 대파한 이 전투에서의 공적으로 정문부는 북평사에서 길주목사로 승진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를 북관대첩이라 하여 북관대첩비가 기념비로 남아 있습니다.
3. 조헌, 1544–1592
학자이자 유학자였던 조헌은 임진왜란 전에도 군사를 준비하고 무기를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깨어 있는 학자였습니다. 충청북도 옥천에서 유학자와 평민으로 구성된 의병을 이끌었던 그는 조선 조정의 몽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관군이 부족한 상태에 처한 충청도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군사를 통솔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조헌은 청주를 방어한 것과 그곳에서 왜군으로부터 도시를 탈환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지역을 방어하던 중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4. 고경명, 1533–1592
고경명은 관직과 파직을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전라도에서 의용군을 이끌었던 또 다른 학자 관료입니다. 그도 조헌과 마찬가지로 현지 유학자와 농민을 동원해 임진왜란에 저항했는데 이치 전투(현재 전주 근처) 방어에 참여하여 그의 군대가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경명은 금산 전투에서 왜군의 대병력을 격퇴시키지 못한채 관군과 함께 전사했고, 그의 아들들도 왜병들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5. 서산대사, 1520–1604
법명이 '휴정'이라고 전해지는 서산대사는 조선 중기의 고승이자 승병장으로 불교의 총대주교인 제63대 조사입니다.
그는 승려들의 호국의지를 모아 전투에 참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승려였습니다. 서산대사는 70세가 넘은 나이에 수천 명의 승려를 독려하며 왜병들을 물리쳤는데, 특히 1593년 행주성 방어 때 왜군을 격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6. 사명대사, 1544–1610
법명인 '유정'보다 사명당으로 더 유명한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으로써 서산대사와 휴정의 격문을 접하고 승병을 조직하여 왜적에 맞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1593년 제2차 진주 포위 때 김시민 장군과 함께 성을 방어하는 데 승병들과 함께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사명대사는 1604년 일본을 오가며 사신으로 활동하면서 전후 일본과 강화협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